※이 글은 온글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쓴 글입니다.
일상, 당연함, 삐딱하게 바라보기
법정으로 끌려가던 소크라테스는 에우티프론을 만난다. 자신의 아버지를 아테네 법정에 고발한 에우티프론을 보면서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대체 왜 아버지를 고발했냐고.
“신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소크라테스가 묻는다.
“신을 모욕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경건함을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재차 다시 묻는다.
“경건함은 무엇입니까?”
“신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또 한 번 묻는다.
“신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경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인 『에우티프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보고 나면 허무함이 남아서 『에우티프론』을 다 읽고 나면 많은 친구들이 ‘그래서 어쩌라는거야!’하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사실『에우티프론』의 진가는 바로 저런 대화에 있다. 일상을 어색하게 만드는 것,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철학함의 기본은 삐딱하게 바라보며 투덜거리는 것에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당연함’에 노출된다. 그리고 교육받는다. 학교의 교육을 받고 있노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만 널려있다. 상식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삶이 제약당하고 규칙이란 이름으로 삶이 제약 당한다. 이런 제약은 그나마 사회적 합의란 이름으로 정당성이라도 가질수 있다. 소소한 권리들은 회사의 방침이란 이유로, 관습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제약 당한다. 다들 익숙해서, 제약 받는 권리들이 너무 소소하거나 참을 수 있는 정도라서 우리는 그냥 ‘당연스럽게’ 넘겨버린다. 그런데 그게 왜 ‘당연한’ 건지 우리는 모른다.
의심과 호기심은 건강한 삶의 기초다. 철학의 삐딱함은 건강한 사회를 위한 삐딱함이다. 건강한 사회에서 살 때 우리는 건강한 삶을 살게 된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면 수없이 많은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된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데 손해를 보는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건강하게 살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하면서 행복하다란 말은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남은 삶이 행복한 삶일 수는 없는 법이다. ‘당연함’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든다. 자잘한 침해와 부당한 합의가 자리를 잡아도 ‘당연’하단 이유만으로 용인된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청년들의 취업난이 왜 청년들의 잘못인가? 청년들이 일할 자리를 만들지 못한 사회가 잘못이지 않은가? 왜 우리의 청년들은 프랑스의 청년처럼 일자리를 만들어 내라며 시위하지 못하고 ‘힐링’만을 갈구하는가. 수많은 청년서적들과 자기개발서들은 자신을 탓하고 자신을 개발해 좋은 상품이 되라고 말하기에 우리는 그 말을 지표삼아 자신을 채찍질 하며 내달린다. 어느 교환학생의 말처럼 한국의 청소년들은 그 말에 사로잡힌 채 ‘압력밥솥에서 밥이 되는 것’같이 12년을 죽어라 고생해서 대학을 온다. 친구랑 친해질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교실과 학교 밖에서 더 많은 추억을 쌓지 못한 채, 자신만의 취미를 가지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대학에 와서 다시 취업을 향해 또 달린다. 자신이 무엇에 흥미를 가지는지, 무엇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왔다 갔다고 말하고 싶은지 고민하지 못한 채. 그러고 나면 어느덧 30이다. 인생의 1/3이 지나버렸는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모른다는 것만 아는데 왜 모르는지는 모른다. 세상은, 그리고 자신은 ‘당연하게’ 살아왔는데 왜 이러는지 모른다.
삐딱하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사회를 향해서 화를 낼 수도 있다. 물론 자기개발서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를 반성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삐딱하게 보기 시작했고 내가 그 삐딱한 시선에 따라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함’은 일종의 죽음이다. 새롭게 들어오는 모든 자극들을 패턴화 시켜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다. 기계가 작동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들어오는 자극에 식에 따라 반응을 출력하는 유기체로 만들어진 기계다. 인간은 죽었고 물질만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에 적응하는 인간으로서는 너무 좋은 지성의 기능이지만 동시에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삶을 없애버린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삶이 아니고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당연하게’ 살아 왔는데 많은 것들을 오히려 모른다.
삐딱하게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해야 할 것 투성이고 바꿀 것들이 투성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삐딱하게 바라봐야 한다. 우리의 자잘한 권리들을 보호하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며 나아가 더 자유롭게 될 방법이 이것 밖에 없으니까.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편안함에도 기계적이지만 자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인간적이니까. 인간적일 때 비로소 우리에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단초들이다.
삐딱하게 보자. ‘당연함’은 우연히 다가오는 세계를, 그리고 미래를 예측가능하게 하기에 대응하기 쉽게 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다. 우리의 영혼에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들은 ‘당연’한 것들보다는 당연하지 않아서 ‘위대한’ 것들이고 그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들이다. (스펙을 쌓기 위한 노력은 우리에게 위대함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막연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감정을 우리에게 전달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삐딱하게 바라보자. 20대에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언제 삐딱하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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