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조선시대를 살펴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특히 이런 입장은 예송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김세봉과 김용흠은 인조 초기 대원군의 친제문제로 시작되어 원종추숭으로 이어지는 전례문제에 대해서 공론정치를 통해서 사대부의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관료들과 불안정한 반정의 형식을 통해서 왕위에 올랐던 인조가 스스로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파행적 논쟁으로 파악한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예송을 파악하는 측면의 문제점은 왕권과 신권이 무엇인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불명확하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원종 추숭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관료들을 통해서 언급된다는 점이다. 대원군 추숭이 상소로 올라와 언급된 것은 인조 2년 경릉 참봉 이의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후 인조 3년 전 판관 유항형이 다시 추숭의 논의를 꺼낸다. 인조는 이에 대한 승정원의 대응에 승인하는 형태로 추숭의 논의를 물리친다. 추숭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입장은 연평대원군 이귀와 박지계의 일파였다. 신권을 행사하는 관료집단 안에서도 이귀와 박지계, 권시 등은 모두 당상관으로 공론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들이 신권을 옹호하지 않고 왕권을 옹호한다는 것은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전례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김류와 이귀가 모두 반정공신이었고 박지계 등도 왕의 권위에 편승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한 권신이었다고 평가하는 방식으로 왕권과 신권의 대립구도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귀가 과감한 발언과 행동으로 인해 인조의 눈 밖에 나고 있는 점에서 왕권에 기대어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권신의 모습을 살펴보기 어렵다. 연평부원군 이귀가 자신의 권위를 깎으면서 까지 왕권 강화에 적극적일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
다른 문제점은 공론을 통한 지배가 당시 사대부의 주요한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공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 사대부다. 따라서 왕권과 신권의 대립을 통해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군왕의 전제적 정치와 관료의 공론 정치를 대립적 입장으로 도식화 한다. 그러나 조선은 유학을 국시로 하여 설립된 나라다. 관료가 공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민을 대표하여 공론을 조정으로 전달하기 위함이었고 최종적으로 공론의 담지자는 군왕이 되어야 했다. 장현광이 인조 2년 인조와 대면하여 보인 인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는 오직 성상께서 인도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군왕은 천리를 알고 천리를 실행하는 주체가 되어야 했다. 공론이란 천리를 밝히기 위해 지방의 사대부와 조정의 관리들이 뜻을 모으고 논의하는 일을 의미한다. 공론을 모으는 것은 군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작업이었으며 그 마지막으로 군왕의 인식과 제가를 요구하는 일이기도 했다. 유학적 군주제 국가에서 왕권과 신권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예학을 바라보는 것은 용어의 사용에서 불철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당시의 상황을 정치적 역학관계로 상황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을 논쟁적으로 바라봄으로서 예학을 바라보는 일정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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