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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역사

사단칠정논쟁과 예학

사단칠정논쟁과 예학



·율 이기론의 결합 17세기 후반 사단칠정논쟁의 확장을 보며

 

 사단과 칠정은 활동하는 마음, 이미 표현된 정감을 지칭하는 것이다. 초기 사단칠정논쟁은 표현되어 나온 감정을 사단과 칠정이라는 두 방식으로 유형화 하여 그것이 각각 리와 기에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 모두 이미 현실화된 정감이라는 점에서 형기를 통해 구현된 것이란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형기는 현실로 드러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기초적인 원리였다. 율곡 이이의 주장은 바로 이 지점을 강조하기 위해 리발의 불가함을 이야기하며 기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율곡에게 사단은 칠정의 일부로 보이게 됐다. 사단이 칠정과 다른 차이점을 가지는 것은 기껏해야 사단을 드러내는 기가 더 맑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사단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유학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되기도 했다. 사단은 맹자가 언급한 이후로 순성한 본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었고 우리가 밝은 본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로 인식되었다. 칠정의 단순한 일부에 불과하다면 사단을 따로 분리해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 사단의 독자적 위치를 확보해야 하나는 점을 인식하고 있던 김창협은 기일도설을 받아들이면서도 리의 발현이라는 퇴계의 초점도 상당 부분 수용한다. 더 나아가 사단은 칠정으로 환원될 수 없고 이이를 비판하며 리의 발을 옹호하는 발언도 보이다. 이는 율곡의 인심도심설에 대한 일정한 비판이다.

 

율곡은 인심도심설에서 선이란 청기가 발현한 것이고, 악은 탁기가 발현한 것이다.”라고 했다.후에 생각해보니 율곡설은 실로 조금 잘못되니 것이다. 청기의 경우 실로 그 발현이 선하지 않음이 없지만, 선한 정서를 모두 청기의 발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또한 악한 정서는 실로 탁기에서 발현한 것이지만, 탁기에서 발현한 모든 것을 악하다고 할 수 없다.부지중에 참된 마음이 발출한 것이요, 바로 거기에서 인간 본성의 선함을 볼 수 있으며, 천리의 쉬지 않고 운행함을 볼 수 있다.사람의 마음이 움직일 때는 리가 비록 기를 탄다 해도, 기 또한 리의 주재를 받는 것이다.”

 

농암 김창협은 사칠론을 주장하면서 리의 운동까지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리의 운동이 기의 운동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단의 마음이란 결국 마음의 본체인 리가 스스로를 현실로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리가 발한다고 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리가 주체가 된다는 점을 드러내 율곡의 입장에 퇴계의 학문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장생이 생각한 예학의 중요성

 

 리와 기가 온전히 나타날 때 나타나는 대동사회다. 율곡학에서 리와 기는 무엇인가?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한다.’는 리통기국을 통해 율곡과 그의 후학들이 생각하는 리와 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리는 어디에나 있고 기질은 그것을 드러낸다. 상황에 따라 리는 가기 위치한 기질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수신의 문제에서 드러난다면 효로 드러나게 된다. 국가와 사회정치에서 리는 각각 군왕과 기강·질서라는 기질로 드러난다. 유학의 사회에서 사회정치가 맑은 기질로 드러날 때 나타나는 기강과 질서는 삼대의 이상이 실현된 대동사회의 이상이기도 했다.

 당대의 현실은 혼탁한 기의 발현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다시 기를 맑게 하는 일이 중요했다. 기를 맑게 하는 일은 수신에서는 거경을 통해 가능하다. 그리고 사회와 정치에 있어서는 예를 바르게 하는 것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되었다. 김장생이 예에 주목한 것과 평생 예를 연구한 이유는 예가 법을 통한 통치를 넘어서서 근본적으로 맑은 기가 리를 드러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조 4, 계운궁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상례의 상주와 복상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은 김장생에게 있어 예를 바르게 하는 시작이었다.

 예를 기강과 질서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인식한 김장생에게 국왕의 올바른 예 구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국가에 있어서 군왕은 리의 표현이다. 군왕이 행하는 올바른 예의 구현은 교화의 원동력이 된다. 예는 신묘한 힘을 가지고 문화적 권위를 획득하게 한다. 문화적 권위는 교화의 힘으로 작동하여 그것을 본 사람들로 하여금 따라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무리함이나 억지가 없이 자연스럽게 무리함 없이 자신의 행위를 마침으로써 그 행위를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구성원의 질서를 만들어 내고 모범적 시현은 사대부를 거쳐 백성에게로 퍼져나가 위와 아래가 모두 통하여 일체화되는 힘을 발휘하게 한다. 김장생이 칭고칭자 논의에서 문제를 제기한 부분도 바로 이 부분과 연관된다. 예라는 행위를 통해서 기를 맑게 하고 상하 모두의 기를 맑게 함으로써 조선이란 사회 전체를 리가 확연히 드러난 대동사회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예치를 통한 대동사회이 구현이란 계획은 덕치를 구현하고자하는 유학의 기본적 이념과도 잘 맞았으면서 제도의 개혁만으로 기대할 수 없는 백성들의 자발적 노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오직 만이 항산없이 항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을 예를 통해 상하 모두 행할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율 이기론 종합으로서의 김장생 예학

 

 이렇게 살펴본다면 율곡의 입장이 강하게 드러난 김장생의 입장이 어떻게 퇴·율 양자를 종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율곡은 적극적인 경장의 입장을 취했다. 퇴계는 거경을 통한 수양의 입장에 기울어 있었다. 김장생의 예학은 거경을 취하면서도 예학을 통한 경장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군주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거경을 통해 올바름을 취하고 국가 단위에서 자신이 가지는 위치, 즉 국가의 보편적 리로서 그것을 행함으로써 국가가 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를 주제하는 리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경장의 완성을 바라봤던 것이다. 예학을 정비하고 전례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면서 김장생이 생각한 것은 재건된 국가의 이상적 모습과 그것을 실현하는 방안으로서의 예학과 예치였다.

 군주의 바른 예의 실행은 지방의 모든 것을 중앙에서 직접 관장할 수 없는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통치방식의 구현이었다. 전국에 눈과 귀를 두어 직접적으로 민에게 말을 할 수 없던 시대에 예의 구현은 반복적으로 동시에 효과적으로 왕의 말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어떤 부분에서 예를 통해서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빠른 전달이 가능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제의적 행위들은 그 자체로 성리학적 질서를 갖추고 있었고 그 질서를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글을 모르는 민에게도 효과적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글을 통해 리에 도달할 수 없는 이들에게도 리를 알려주기 전해 행동으로 기를 맑게 함으로써 그들을 교화시킬 수도 있었다. 예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기에 왕과 민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사대부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효과도 같이 얻을 수 있었다. 예는 법이면서 법이 아니었고 사사로운 것이면서 사사롭지 않은 것이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행동을 통해 맑게 하면서도 그 행동의 시점에서 리가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리의 적극성과 리통기국의 원리에 따른 수양론을 치국의 방식에 맞춰 적절히 조화시키자 했던 김장생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농암집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유학사상대계-철학사상편(), 상지사, 2005.

- 이현진. "논문: 17 세기 전반 계운궁 복제론-김장생, 박지계의 예론을 중심으로." 한국사론 49.단일호 (2003): 87-126.

- 김태완. "사계 김장생의 예학과 사회정치사상." 율곡사상연구 21.단일호 (2010): 217-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