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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1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1


행복이란 무엇인가?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란 개념이 부당한 공격을 많이 당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러 공격을 방어하면서 공리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공리주의란 효용과 최대행복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는 이론을 말한다.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옳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으면 옳지 못하다고 판단을 내리는 이 원리는 행복을 쾌락 혹은 고통의 부재로 파악하고 행복에 반대되는 것은 고통 혹은 쾌락의 부재로 파악한다. 고통과 쾌락이 무엇인지 정의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자유와 쾌락만이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란 사실을 강조하는 도덕률을 제공한다. 공리주의에서는 바람직한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쾌락 때문에 또는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을 늘려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질문쾌락 말고 추구하는 것이 없다는 주장은 천박하다?

공리주의의 주장은 느낌과 목적을 주된 관심사로 하는 사상가에게 반발을 일으켰다. 쾌락 말고 추구하는 것이 없다는 주장은 천박하다는 생각을 그들에게 들게 했다. 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이 돼지만 느끼는 정도로 쾌락을 느낀다고 상정하는 것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장에 반박한다.

반박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르면 모든 좋은 삶은 돼지에게나 인간에게나 동일한 것이 된다. 우리는 여기에 모욕감을 느끼는데 이렇게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행복과 돼지의 행복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른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미달되는 쾌락에 대해서는 행복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쾌락을 이야기한 모든 철학자는 쾌락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주장해 왔다. 에피쿠로스는 감각작용에 의한 쾌락보다 지성이나 느낌, 상상력, 도덕 감정의 쾌락이 우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자들도 내재적인 본질은 몰라도 정신적 쾌락이 항구성, 안정성, 비용 등 주변적 장점에서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더 바람직한 쾌락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도 공리주의 원칙에는 별로 위배될 것이 없다. 다른 모든 것에서 양과 질을 모두 따지면서 오직 쾌락만은 양만 따져야 한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 쾌락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는 준거가 되는가? 존 스튜어트 밀은 이것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두 쾌락이 존재할 때, 둘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들 모두, 혹은 거의 모두가 도덕적 의무와 관계없이 그 중 하나의 선호를 뚜렷히 나타낸다면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설명한다. 양이 적어도 어떤 하나를 원하면 양이 문제 안 되게 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쾌락을 잘 알고, 그 둘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더 높은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특수한 삶의 방식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우리가 부정하기 힘들 것이라고 밀은 주장한다. 굳이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스스로 가진 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불행에 시달린 나머지 전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 때문일 것이다.

타고난 것이 월등할수록 행복을 느끼는 것은 더 힘들다. 심지어 고통을 더 예민하게 느끼고 고동을 당하는 것은 더 쉽다. 그래도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이 더 낮은 삶을 선택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4 가지 정도가 된다. 하나는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나 자존심은 고귀한 감정과 비열한 감정 모두에서 적용된다. 두 번째는 자유와 개인의 독립성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역시 이것을 중요시했다. 세 번째는 권력이나 흥분상태에 대한 사랑이다. 확실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 속에는 이 둘이 들어 있으며 행복을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적합한 개념은 마지막 이유인 인간으로서의 품위(sense of dignity)”. 이 품위는 대체로 각자의 능력에 비례해서 커진다. 품위가 높을수록 그 품위가 행복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따라서 품위와 대립하면 그것은 일순간을 제외하면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질문인간적 품위를 강조하면 행복을 잃어버린다?

 이는 행복과 만족을 혼동한 결과이다. 즐거움을 향유하는 능력이 낮을수록 만족하기란 쉽다. 반면 수준이 높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도달할 행복이란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느낀다. 불완전하다는 것을 감내할 만하다면, 그것을 감내하는 사람은 참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불완전하기에 얻는 것이 좋다 느끼지 않음으로써 의식도 못하는 쾌락들에 대해서 부러움도 역시 느끼지 않을 것이다. 결국 여기서 존 스튜어트 밀은 유명한 이 말을 한다.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

 

질문높은 차원의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 중 상당수가 때로 유혹을 못 이겨 저급한 쾌락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다고 해서 높은 차원의 쾌락이 내재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심지가 굳지 못해 종종 저급해짐을 알면서도 눈앞의 좋은 것을 쫒아가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런 경향은 정신적인 것과 쾌락적인 것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쾌락 사이에도 나타난다.

이런 상황은 흔하지만 그렇다고 자발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높은 수준의 쾌락을 재대로 향유할 형편이 못되기 때문이다. 고상한 감정을 향유하는 능력은 비유하자면 약한 나무와 같아서 부적절한 환경에 영양분 부족을 겪으면 죽기가 십상이다. 먹고 살기 위해 가진 직장이나 사회적 상황이 개인에게 적대적이면 젊은이들에게서 이런 능력을 쉽게 사라진다. 낮은 수준의 쾌락을 향유하는 것이 그나마 그가 오래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되기에 선택한 것뿐이다.

 

질문두 쾌락사이의 우월관계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덕적 속성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고상한지 판단이 일치하지 않으면 다수의 판단이 가장 존중되어야 한다. 질만 놓고 볼 때 이런 결정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는 양의 문제에서도 심판관이 없기 때문이다. 쾌락과 고통은 동질적이지 않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고통은 언제나 쾌락과 이질적이다. 따라서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의 여부는 경험자의 감정과 판단이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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