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정의는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공정함이 사라진 곳에서는 갈등이 발생하고 혼란스러우며 나라가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 지도자는 언제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이며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정의를 구현하기 어려워진다면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까지만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명확히 했다. 더 나아가 플라톤의 국가에서 나왔던 내용을 일부 수정해서 자신의 책에 사유재산에 대해서 부정을 하며 정의를 구현하는 것을 강조했다. 양모산업의 발달로 인해 인클로져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것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부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욕심이 나라를 좀먹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역시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나라의 크기를 제한 할 것과 지나친 부의 축적, 더 나아가 사유재산에 대해서 비판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이야기 모두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야기한 주장들을 당시 영국의 상황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행정력의 범위에 대해서는 플라톤이 폴리스 단위로 설명하던 것을 영토국가로 전환되어 가던 유럽국가의 현실적 통치범위로 확대하고 있는 점에서만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당시 군주들은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이야기하듯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지배자가 되고자 했던 영주의 개인적 욕심이 유럽 전역을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사에는 시민들의 삶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 모어의 주장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군주의 존재는 시민들의 편안과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정력의 제한을 요청한 이유는 바로 저 명제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주의 통치가 정상적으로 미치지 않으면 시민들의 행복과 편안이 유지될 수 없다는 생각이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무능한 통치와 통치의 부재는 그 결과가 다르지 않고 그 상태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듯 보이는 저 발언을 통해 우리는 모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몇 가지 추론할 수 있다.
하나는 무능한 통치는 무정부적인 통치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통치의 범위가 늘어나면 날수록 통치가 효율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의 무질서함이 같이 증가한다. 그것은 무질서가 만들어 내는 무정부적 상태와 다르지 않다. 무질서한 사회는 도둑과 절도범이 횡횡하고 게으른 자와 노약자가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회다. 혹은 죽어가는 사회다. 정직한 자가 없고 불의한 자가 판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사회에 있게 된다. 국가가 국가의 역할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전쟁을 멈추고 공정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군주의 최우선 과제임을, 그래서 국가의 범위를 한정시킬 것을 과감하게 언급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행복과 편안을 갖추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국가의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다. 국가는 공정하지 않은 공간을 공정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이다. 공정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로를 믿을 수 있고 생계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여기서 공정한 기초를 만드는 것에 국가의 역할을 한정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토머스 모어가 여전히 고전적 전통 속에서 국가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의 역할은 사회를 공정을 만들면서 시민들을 이 공정에 익숙하게 만들고 사치에 물들지 않도록 육성하는 것에 있음을 2권을 유토피아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확실한 것은 그가 정치가 없으면서 행복한 시민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란 점이다. 국가의 존재가 시민을 만들어내는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충분조건인 것은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조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나 국가의 상태에 행복의 기초를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은 중세를 거치면서 다시 종교의 삶보다 정치의 삶이 중요하단 생각이 부상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유재산에 대한 그의 거부감은 그것이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삶을 이성에 기반 하지 않고 욕구에 몰두하도록 몰아간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부를 사적으로 분배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자연적 불균형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다시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인간의 재능이 자연적으로 불평등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재능은 자연적으로 불균등하게 나뉘어져서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도 그 불균등한 재능에 따라 부가 나누어질 것이다. 사회가 부에 대한 높은 가치와 평가를 한다면 자연적인 삶 안에서 각기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으로 인해 그의 가치와 평가가 결정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사회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일에 대한 재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는 언제나 가장 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람으로 구성되어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최선의 재능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최선의 재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지도 않을 것이고 재능을 키우려고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것은 사회가 원활하게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회는 건강하지도 않다. 다수의 게으름뱅이와 구걸하는 거지들로 구성된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재능을 발전시키면서도 각자의 일, 개인의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게 하는 것이 국가가 나서서 만들어야 하는 주요한 사업이 된다. 그것은 사치품의 소유를 제한하고 부를 하찮게 여기게 하며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게 만든 사회, 바로 유토피아의 사회를 통해서 명확해진다.
다른 하나의 불평등은 사회적 기능의 차등적 가치분배다. 모든 기능이 사회를 위해서 필요하지만 덜 필요한 기능이 존재할 것이고 더 필요한 기능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불편하게 되겠지만 우리의 삶에서 더 필요한 기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금전으로 평가하면 직군에 따라서 차등이 발생한다. 금전적인 것을 숭상하는 사회라면 직군의 사회적 불평등이 자연스럽게 전체의 불균형을 만들어 내고 사회의 기능을 한 곳으로 쏠리게 만들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사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제 기능을 다 하는 사회는 모든 기능이 분화되어 각자의 역할을 각자가 해야하지만 직군의 불평등이 금전적으로 표현되고 금전적인 것이 숭상되는 사회에서는 각자의 역할 분배가 시장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치되지 못하거나 일종의 낙오를 통해서 낮은 금전적 보상 직군으로 흘러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두 불평등은 사적 재산의 긍정이 만들어내는 자연적 불평등이다. 공정함은 각자의 몫을 나눠주면서도 동시에 정치 체제 안에서 모두가 사회에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사회가 전체적으로 번영하는 것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이 모어에게 있다. 결국 이런 정의를 위해서 사적 소유를 철패하고 각자가 노동을 통해 만족을 얻는 사회를 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모어는 유토피아를 직접적으로 말하기 전에 1권에서 정치의 핵심을 집고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정치는 두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통치자의 층위다. 통치자는 정치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 정치의 핵심은 모어에게 아직까지 행복을 구현하는 일이다. 사실 현대의 정치도 결국은 최종적으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정치적 지도자의 행위는 자신이 가진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까지 정치적 공동체를 통해 질서와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다른 층위는 시민의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치를 규제하고 노동을 통해 각자의 몫을 사회의 번영으로 보상받는 것을 요구한다. 사회가 가난하지 않기에 구성원도 자연스럽게 가난하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통치행위와 구분되는 정치의 다른 층위다. 모어는 두 층위가 함께 최선으로 움직일 때 공정한 사회가 구축되고 여기서부터 사회가 유토피아로 나갈 수 있음을 1권에서 말하고 2권에서 그가 그리는 이상사회, 바로 유토피아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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