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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

윤리적 상대주의와 그 반박

※ 주의 : 이 글은 공부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상당히 오래된 입장이다.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주장이 윤리적 상대주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가장 초기의 상대주의적 흐름을 볼 수 있다. 이후 개인적인 판단중지를 요청하는 헬레니즘 시대의 회의주의를 거쳐 현대에 들어오면 개인적 회의주의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고 문화적 상대주의가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상대적, 혹은 사회적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사회적 혹은 문화에 예속된 문제라는 인식은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격언은 문화마다 다른 도덕적 규범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과거부터 인식했다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다시 말해서 상당히 상식적은 주장이라는 점이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그렇게 새롭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도덕적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근거는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 가장 영향력이 있는 근거는 세상에는 다양한 도덕관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문화에 우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우열의 관계가 존재한다면 우등한 문화가 올바른 문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발달하면서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문화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이런 설명을 할 수 없다. 다양한 영역에서 논의를 통한 합의가 가능하지만 다른 문화 사이의 윤리적 판단을 합의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일부일처제에 대한 판단이 다른 경우는 쉽게 볼 수 있는 합의가 불가능한 지점이다. 일부일처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많은 미망인이 발생한 상황에서 이들을 안정적으로 살리기 위해서 발생한 일부다처제를 과거의 역사적 맥락을 소거한 상태에서 바라보는 것은 무슬림들에게 부당하다.

그러나 문화 다양성에 대한 반박은 역시 가능하다. 견해의 충돌이 반드시 도덕적 불일치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견해의 차이라기보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혹은 판단이 불일치하여 합의가 불가능한 상황이 존재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 문화적 다양성 안에서도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들을 통해 일정한 조건에서 도덕적 합의를 이루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슬람의 일부다처제가 처음 발생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한 남자가 다수의 미망인을 거두지 않았을 때 그 미망인과 미망인의 아이가 죽음에 이른다고 해도 일부다처제를 무조건 거부만 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일부일처제에 대한 주장은 어느 정도 굽힐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존엄성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선되는 것이란 생각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이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레이첼의 책 도덕철학의 기초에서 에스키모의 유아살해도 역시나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저자인 레이첼이 설명하고 있다. 설사 이런 모든 조건들을 다 동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도덕적 옳음이란 것은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 이 두 문화는 대화를 통해 어느정도의 타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을 수 있다.

둘째, 도덕적 불확실성이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도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에서 윤리적 상대주의를 옹호할 수 있다. 개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도 판단할 수 없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편적 도덕법칙을 세우는 것 자체가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의 옹호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그냥 혼동해서 나타난 결과다. 또한 어떤 문제가 어렵다고 해서 그 문제에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도 이상하다. 문제의 어려움이 문제에 답이 없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올바른 것이 있다고 믿는 비상대주의자들은 그 올바른 것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할 것이고 그 노력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윤리적인 것에 대한 좋은 기준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은 이룰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셋째, 상황적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상대주의는 옹호되기가 쉽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똑같은 도덕률을 제시하고 그것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딱히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칸트와 같은 매우 꼼꼼한 상황에 불변하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신기하다.

이런 입장은 대체로 객관주의를 절대주의로 오인하는데서 비롯된다. 절대주의는 도덕적 규칙과 원칙이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하며 상황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객관주의는 객관적인 선이 존재하더라도 구체적인 사례가 다르면 행동의 모습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이런 설명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마치 객관주의는 없고 모든 도덕론은 절대주의와 같이 생각해버린다.

넷째, 서로 합의된 동기가 없다면 비판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하만의 경우에는 합의된 동기 M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하만은 아에 이 합의된 동기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면 어떤 판단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대체로 도덕적 판단은 행위가 A가 행위 B를 할 때 관찰자 C가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되는데 관찰자 C와 행위자 A가 서로 합의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에 그의 행동이 왜 유발됐는지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도 문제점이 존재한다. 문화가 모두에게 단일하게 합의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동의하는 도덕적 행위의 범위가 상이하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친구와 나의 도덕적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같은 문화에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도덕적 판단이 문화적으로 단일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합의된 동기는 암묵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암묵적 구성은 사실상 합의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화를 해도 합의가 재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암묵적으로 단일한 합의를 이룬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문화의 다양성, 도덕적 불확실성, 상황적 차이, 합의된 동기의 부재라는 근거를 통해서 옹호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옹호들은 다양한 문화 내부의 보편적 가치, 불확실성으로 인한 해결가능성 배제 불가, 객관주의의 융통성, 합의된 동기의 모호함으로 인해 반박될 수 있다. 더군다나 윤리적 상대주의는 그 자체로 보수적 성향, 즉 타 문화에 대한 영향 축소나 부정을 하는 경향성을 보여주거나 내적인 반성의 부재를 촉진하는 경향성을 보인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윤리적 상대주의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