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인권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존재한다. 누군가는 보편적으로 인권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 충분히 고려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가능성과 동시에 인간이 문화적으로 제한된 존재라는 두 지점은 모두 일정한 통찰을 가지고 있다. 두 관점의 차이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야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개별성의 완전한 인식 속에서 우리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나타난 자유주의의 확신은 현실적인 적합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의 개인에 대해서 고민한 사람 중 하나는 맥킨타이어다. 맥킨타이어는 현대 도덕이론은 계몽주의 기획의 실패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목적론과 계급구조에서 벗어난 도덕적 주체는 스스로를 도덕적 권위의 주권자로 생각했다. 더불어 도덕적 규칙은 과거의 지위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지위를 발견할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지위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규칙들은 모두 개인적 욕구로 추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새로운 목적론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범주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처음의 방법은 공리주의의 기획으로 나타났고 뒤의 방법은 칸트와 같은 시도들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러나 그는 이 두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실패의 과정에서 사회적, 지성적 변화가 나타났다고 판단한다.
공리주의는 새로운 목적론으로서 제시되었는데 벤담은 고통과 쾌락만을 우리의 목적으로 제공한다. 그러나 쾌락과 고통을 통한 설명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대답도 주지 않는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내용이 없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공리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문제를 인식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통일성을 가지지 못하는 직관들로 구성된 도덕의 목적들이었다.
한편 분석철학자들은 도덕적 주체의 자율성과,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권위를 지닌 것으로서의 도덕 규칙을 조화롭게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즉 모든 이성적 행위자들은 그들의 이성을 통해 도덕 규칙을 논리적으로 준수하려는 것을 입증하고자 시도하였다. 특히 지워스(A Gewerth)는 자유와 복리를 필수적 선으로 간주하고, 그 행위자는 자유와 복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Gewerth는 합리적 행위의 실행을 위한 전제조건들을 필수적 선으로 간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선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논리적인 책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권리 개념의 도입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우리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개인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는 서로 다른 명제다. 그리고 첫 명제에 의해서 타인은 나의 노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두 번째 명제에서는 그것이 도출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그것이 필수적 선이라 하더라도 그 선의 소유에 대해서 남에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권리에 대한 소유를 주장해야하는 책무도 남아있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이런 점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으로도 독립된 개인”이라는 개념과 이것에 기초한 권리는 허구적인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효용”이 허구라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불가공약의 성격을 가진다. 이 불가공약성을 통해 자의성과 욕망을 도덕이란 이름의 이면에 숨겨 버린다.
기어츠는 독립된 개인의 문제를 깊이 있게 문제제기 한다. 기어츠는 자유주의가 언급하는 개인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계몽주의 시기 사람은 인간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매우 보편적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기어츠는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해 버린다. 기어츠는 질적인 것이 가지는 차이에 대해서 긍정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깊이 고민한다. 그리고 그 질적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문화라는 지점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드러낸다.
문화는 세 가지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선택에서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사람이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완전히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도덕적 선택을 하는 순간에도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아즈텍 문명의 인신공양을 아즈텍인들이 스스로 유아살해로 인식하지 않고 선택하게 되는 부분들이 존재할 것이다. 노예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긍정 역시 당시 그리스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집단 내부에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정체성의 형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개인들이 가지는 자존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인간은 문화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개인은 문화와 자신의 이성적 판단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안정감과 자존감을 확보한다. 결국 기어츠의 주장은 인간과 문화가 서로 교류하면서 각각의 문화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이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는 지점이다.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은 현상학적으로 동일한 발생경로를 가지고 동일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상호배타성을 가진다. 기어츠의 입장에서 보면 보편적 인권이라는 단일한 가치를 설정하는 것은 무리다.
한편 인권의 보편성에 대해서 마샬은 다른 이해를 한다. 마샬은 영국의 사례를 이용하여 권리의 확대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8세기에는 공민권을 획득했고 19세기에는 정치권이 획득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마셜은 20세기에는 사회권의 획득에 대해서 언급한다. 마샬은 시민권이 보편적인 인권의 기초라고 생각했고 지난 역사의 과정이 그런 경로를 지나쳐왔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인권을 보장받고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 시민권의 확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회권의 개념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을 의미한다. 1950년대 모두가 평등한 연대성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공동체 자체를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이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 내부의 의무에 대한 관념들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복지국가의 형성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발생했다. 이는 연대성에 대한 일정한 고민과 노력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대성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서 일정하게 제한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져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대를 위한 평등성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 전반에 대해서 제약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마샬은 자유의 제약이 사회에 있는 차별의 요인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별의 요인이 제거된 이후에 나타나는 문제들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나타난 차이라고 판단한다. 인권을 통해서 논해야 하는 대상은 우리 사회에 깔려있는 차별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브라이언 베리는 이와 같은 입장을 세계시민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서술한다. 그는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분명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인권에 대한 생각에서 나오는 중요한 핵심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런 문제가 문화적 차이를 차별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점은 문화와 같은 요소가 아니라 계급적 격차의 문제가 모든 차별의 원인으로 작동하며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지 않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베리는 문화가 관습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을 근거로 문화를 긍정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지속적으로 해왔다고 그것이 긍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당화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예제를 긍정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해서 노예제가 정당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할례가 문화적으로 허용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긍정하고 인정해줘야 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문화는 그 자체로 긍정 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판단하고 점검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문화가 행복의 기초라는 사실도 비판한다. 문화는 집단내의 논의를 어느 정도 봉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문제는 이런 봉합에 있다. 문화 내에서 긍정되는 것들은 매우 보수적이고 이미 관행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긍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각 집단마다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19세기 낭만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낭만주의적 성격은 지나치게 나아가면 나치의 등장과 같은 문제를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모든 문화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가치 판단은 전적으로 개인이 판단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공적인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의 베리의 주장이다. 그리고 개인은 모든 문화를 동등하게 긍정할 수 없음을 들어 문화자체를 남용하여 사용하는 것에 비판을 가한다.
이런 두 입장의 차이를 현실적인 문제로 다루는 시도는 유교와 인권을 서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진행한 드 베리와 뚜웨이밍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드 베리는 유교 논리가 권위적인 체제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시민사회의 논의를 내포하고 있지도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입장은 맥킨타이어나 기어츠가 주장하는 지점과 일정하게 만나는 지점이 있다. 이런 지점에서 유교는 인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내용이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유교가 정치결정에 참여를 강조하는 형태를 띄지 않기 때문에 가치를 실현하는 형태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나 법적인 내용을 만들고 강제하지 않으면서 의식과 도덕 관념을 중심으로 개인의 행위를 제약한다는 점은 유교가 인권의 요소로 확대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유학은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관계 중심성으로 인해서 파생되는 인가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서구의 인권개념과 상호보완적 관계를 가진다는 분석을 내린다. 한편 뚜웨이밍은 드 베리의 주장과 다르게 개인주의적 요소가 인권을 성립시키는 요소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유교에는 이런 개인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교에 있는 이런 요소들은 서구 사회의 인권논리와 호환될 수 있는 요소가 많으며 또한 인권 개념의 확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인권의 기초다. 그러나 서구의 개인주의는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교의 논리는 서구의 개인주의적 전통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쇠시켜줄 수 있는 부분들이 존재한다고 뚜웨이밍은 주장한다.
드 베리와 뚜웨이밍은 유학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 일정부분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유학이 일정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인권 개념에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뚜웨이밍은 더 나아가 자생적인 인권개념의 등장도 가능하다고 생각을 한다. 이들의 입장은 보편적 인권론에 기대고 있다기보다는 문화에 집중하여 인권문제에 다가설 필요가 있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지금까지 언급된 노력들은 이성을 통해 문화를 바탕으로 문화에 맞는 인권 개념을 찾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보편성으로 나아가는데 이성을 활용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인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성만으로 이런 것들이 가능한가? 이간은 이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성과 감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존재로서 존재한다. 마사 누스바움과 노튼은 이성적인 능력을 통한 인권개념의 형성보다는 감성, 특히 연민의 감정을 통한 인권 개념의 형성을 언급한다.
감정은 이성과 다르게 개별적 존재들이 모두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상호인식 역시 이성보다 단순하다는 점에 대해서 인권의 개념을 자리잡게 하는데 유용하다. 또한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인권의 요소를 생각하게 한다. 연민은 타자에 대한 공감과 포용으로 나아가는 힘을 가진다. 누스바움은 연민의 과정에서 공감을 방해하는 요소로 수치, 혐오, 부러움을 언급한다. 이것들은 연민에서 공감으로 나아가는 감정의 흐름을 방해한다. 누스바움에게 있어 인권의 개념화는 연민과 공감이 방해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탕으로 이해된다. 특히 누스바움은 연민을 느끼기 위해서 몇 가지로 그 조건을 서술하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내려지는 판단은 매우 즉각적이고 강력하다. 그러나 연민이 조건이 맞으면 바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스바움 역시 이 지점에 대해서 고민한다. 우리의 외부 조건 속에서 우리의 내면은 연민을 느끼는데 방해받는 요소가 너무 많다. 누수바움의 고민은 이런 방해를 최소화하고 최종적으로 없애버림으로써 우리가 즉각적으로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 고민의 해결을 누스바움은 교육에서 찾는다. 교육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에 고통과 불행을 느끼며 그것을 통해 그들에 대한 어떤 감정이 생기는지를 학습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누스바움은 연민이라는 감성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교육을 통해서 보충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해결은 보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문화적 맥락의 한계 속에 노출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기도 한다. 각 문화권에서 소비되고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도 상이한 상황에서 각각의 감성적 훈련과 육성에 필요한 문학교육이 보편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이런 방식을 통해서 우리가 매우 보편적인 인권의 관념을 가지게 될 것이란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노튼은 흄의 개념을 가지고 와서 공감의 문제를 통해 연민을 설명하려고 한다. 흄이 자주 사용하는 sympathy는 누스바움이 이야기하는 고통과 불행에서 나타나는 연민의 감정과 다르게 고통과 쾌락 양자에서 그 감정을 모두 느끼는 연민이다. 흄은 공통 감각을 통해 우리가 상식으로 나아가는 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전형적인 도덕감정론의 맥락을 같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행동을 하게 될 때, 그리고 무엇인가를 볼 때, 고통과 쾌락을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노튼은 이런 부분들을 물리적 현상의 이해로 확장시키고 싶어한다. 흄이 강조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은 신체의 물질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연민의 감정의 기반을 개인의 신체성으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스바움이 고민하는 지점, 바로 어떤 사건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불쾌하던가 아니면 유쾌하던가 하는 반응의 일관성이 나타나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일정부분 자유로워진다. 인간 종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성은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질은 실질적으로 개인에게 강하게 귀속된다. 그것이 종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감각질을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감각의 문제로 들어오게 되는 경우 우리는 개인의 주관성문제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부분이 생긴다.
연민의 논의는 분명하게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이 최초로 느끼는 인권의 감정이 어떻게 유발되는지를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로 유발되는 과정의 설명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혹은 상호주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인권 개념의 정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단계가 필요한 것을 보인다. 우리가 서로의 근사치로 이런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지점들은 모아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보편적인 것의 성격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우리는 보편적 인권에 도달할 수 있을까? 벤담은 프랑스 인권선언을 통해서 문제점을 지적하며 인권은 특정한 사회의 법률 안에서 등장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프랑스 인권선언을 매우 형이상학적인 문건이라고 생각하고 비판한 벤담은 이 선언 안에는 인간중심성이 없다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생각한다. 자연권가 자연법은 근거로 삼기에는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오직 법률로 정함으로써 서로가 합의에 이른 개념을 통해서만 인권의 개념이 도출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하버마스다. 하버마스는 찰스 테일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진행한다. 문화적 권리의 등장과 이를 통한 인정의 정치를 진해하려고 하는 그의 주장은 매우 한계가 있다. 인정투쟁의 문제는 대체로 자유주의 내부에서 소비되고 보존될 수 있다고 하버마스는 생각한다. 에이미 구트만이 자유주의를 두 가지 흐름으로 정리한다. 모든 것을 평등하게 인식하는 자유주의 1의 문제점을 자유주의 2에서 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의 권리추구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버마스는 이런 구분의 문제는 개인의 온전한 권리추구를 제한한다는 지점에서 강하게 비판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사적 권리주체들의 평등한 개인적 자유는 공적 자율성을 행사하기 위한 이해관계와 판단기준을 명확하게 하고 그것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보장되어 질 수 있다. 찰스 테일러가 말한 공동체의 자유인가 아니면 개인의 자유인가에 대한 논쟁은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절차에 대한 절차적 법이해가 대신 자리해야 한다고 하버마스는 강조한다. 결국 개인적 자유를 손상시킬 수 있는 체계외적인 집단적 권리의 도입을 기획하는 대신 자유주의가 원래 내포하고 있는 권리체계를 철저하게 실현해야만 하는 실천적 명제가 여기서 성립하게 된다. 여기서 헌법 애국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헌법 애국주의의 등장은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현실적 상황에서 인권의 문제를 절차의 문제를 통해서 해소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현대 사회의 문제들은 절차 내의 인정투쟁을 통해 해소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보편적 인권은 절차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정한 합의의 연장성 속에 존재해야 하며 이 절차상의 토론 과정은 그들의 인정투쟁을 모두 보편적 형태로 전환시키며 인권의 확대에 기여할 것이란 점에서 일정한 시사점을 가진다.
문화적 특징을 강조하는 개별성의 문제는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주변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문화는 일정한 순환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이 인권에 대한 보편적인 느낌을 전혀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가지는 연민의 감정은 개인개인들이 인권에 대한 감수성 자체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감수성을 교육한다고 해서 바로 우리는 인권을 도출할 수 있을까? 또한 개인의 신체적 한계에 매몰되어 있는 감각의 문제를 상호주관적인 형태로 나타닐 수 있을까? 결국에는 이성이 어느 시점에서 개입해야 한다. 또한 사람이 단순히 관계성으로 사람과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형태로 맺어진다면 사회의 규범과 규약으로 이것이 명문화 되어야 한다. 그런 지점에서 벤담의 기초적 아이디어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으로 넘어와 헌법 애국주의의 형태로 발전하고 그 안에서 사회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명문화된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양한 인정투쟁 속에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문서로 합의된 결과는 보편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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