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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

질적 쾌락의 논리와 밀의 공리주의의 양립가능성

※ 이글은 공부를 하기 위해 습작으로 쓴 글입니다.


질이 높은 괘락의 우월성을 말하는 밀의 주장은 일견 공리주의와 양립불가능해보인다. 이런 주장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잘 드러난다. 마이클 센델은 이 책에서 개인의 권에서 그랬듯이 고급 쾌락에서도 밀은 공리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히 쾌락과 고통으로 이분해서 계산해버린다는 혐의를 벗기려 노력하지만, 되레 공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고 만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밀의 입장이 공리주의에서 멀어짐을 강조한다.

그러나 밀의 주장은 공리주의와 멀어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밀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공리주의자로 자처했음은 물론이고 공리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살아갔다는 사실을 통해서 공리주의에서 멀어졌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공리주의의 주요 목적을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 역시 그가 공리주의를 수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하다면 어떻게 질 높은 쾌락의 우월성은 어떻게 공리주의와 매끄럽게 연결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첫째, 질 높은 쾌락의 우월성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위해서 밀이 도입한 방법은 시간의 유예다. 벤담의 쾌락과 고통에 대한 산출은 시점을 쾌락과 고통이 발생한 시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질 높은 쾌락이 막 실행됐을 때 발생하는 고통의 크기가 모두 잡힌다. 반면 질 낮은 쾌락은 발생 초기에 나타나는 쾌락의 크기가 모두 잡힌다. 그러나 모든 행동은 그 결과물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즉각적으로 결과가 발생하는 행위들이 존재한다. 그런 행위들은 즉각적으로 수치화하여 산출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즉각적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서는 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점을 쾌락과 고통의 산출시기로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건강한 몸을 가지고 위해서, 속된 말로 몸짱이 되기 위해서 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운동의 쾌락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몇 개월이 지난 후에 나타나는 반면 당장의 신체적 고통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동의 행위를 고통으로 잡아야 하는가, 아니면 쾌락으로 잡아야 하는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운동의 효과가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몇 개월 뒤의 쾌락을 결과로 산출해서 잡아야 한다. 혹은 후일에 생기는 쾌락의 값과 즉각적 고통의 값을 산출하여 각각을 뺀 이후에 나오는 값을 최종적 산출값으로 잡으면 된다. 보통 고통의 지속성보다는 쾌락의 지속성이 더 길게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경우 질 높은 쾌락의 쾌락값이 전체 쾌락을 상승시킬 가능성이 높다. 즉 밀이 주장한 질 높은 쾌락의 우월성은 가장 중요한 공리주의의 전제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 존엄성과 개성이 결과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한다.

둘째, 수량화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수량화가 복잡한 것이지 수량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쾌락의 지속성에 가중치를 주고 나중에 나타나는 쾌락값에서 즉각적인 고통값을 빼주면 수량화가 가능하다. 그 수량화한 값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문제가 남지만 개인이 느끼는 감각에 대해서 수량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발생되는 문제점은 굳이 밀의 문제점만은 아니다.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처음에 수량화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 사람은 밀이 아니라 벤담이다. 수량화는 모든 공리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해결해야하는 과제일 뿐이다.

셋째, 공리주의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인식론을 벗어나지 않는다. 공리주의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쾌락을 주관적으로 느낀다는 것을 가정한다. 각각의 행위들에 질적인 쾌락이 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쾌락을 느끼는 것은 주체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벤담과 완전히 똑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벤담의 경우에는 쾌락이 대상에 내재적인지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체의 영역으로 넘겨 설명을 했다면 밀은 쾌락을 느끼는 주체와 쾌락의 대상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언급함으로써 공리주의 설명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주체가 느끼는 대상에 차등성을 주어 쾌락을 느끼는 과정을 좀더 현실에 맞게 조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외부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인해서 오히려 벤담이 가질 수 있는 쾌락값의 불안정성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벤담의 경우에는 쾌락을 순전히 주체에 부여함으로써 쾌락값이 개인마다 상이한 차이가 나타나도 조정할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이는 더 많은 쾌락을 양산하는 정책을 찾아내 입안함으로써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벤담의 계획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이렇게 된다면 공리주의의 가장 큰 단점인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눈감는다는 지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즉 주체항만 있을 경우에 공리주의의 불안정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반면 밀의 경우 항을 두 개로 늘림으로써 안정성을 높였다. 쾌락 자체는 감각 대상에 맡겨놓고 쾌락을 느끼는 것은 주체에게 남겨뒀다. 이로 인해 쾌락을 온전하게 다 느끼면 나타날 수 있는 쾌락값이 고정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이제 하나의 행위를 할 때 그가 느끼는 쾌락값이 최대치인지 아니면 중간정도인지 혹은 최저인지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한 정책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가 인간 존엄성과 개성, 그리고 교육을 강조한 것은 바로 이 관계항 사이에서 온전히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주체를 육성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가 질 높은 쾌락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한 부분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두 쾌락을 모두 경험하고 그 경험을 온전히 다 이해한 사람은 당연히 질 높은 쾌락을 선호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쾌락이 경험대상에 내재함으로써 가능해진 결과다. 이는 쾌락이 완전히 주체에 귀속되어 있을 때보다 사회개혁을 위한 정책을 측정하는데에도 훨씬 안정적인 방법이었다. 동시에 상식적인 도덕 법칙에도 크게 위반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과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한 질 높은 쾌락의 우월성은 공리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인실론을 일부 수정하여 이론의 안정성을 더 높일 수 있는 방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