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 우리는 무엇인가?
- 정치적 주체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랑시에르와 마르크스
토론자 : 왕복근
우선 이번에 토론의 기회를 마련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치적으로 시민의 활동이 강조되고 있는 현 시기에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논의는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논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활동을 지속하는데 있어서 어떤 주체가 필요한가는 박근혜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현 체제 이후의 새로운 체제를 논의하는데 있어서도 선행되어야 하는 논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토론은 이번 발표문을 읽고서 제가 느낀 점과 같이 토론 지점들을 같이 나누는 것에 의미를 가졌으면 합니다.
불화의 운동론
발표문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광장의 시민들에게 사람들에게 ‘불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표문은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인 ‘불화’를 작동시키기 위한 일종의 운동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불화의 존재가 정치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불화를 겪는 정체성간의 협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불화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동력입니다. 그러나 이 동력은 외부의 자극적 변화를 통해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식 그자체가 바로 운동성을 가진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화’라고 옮긴 메장탕트라는 프랑스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듣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프랑스어에서 ‘앙탕드르’(entendre)라는 동사는 ‘듣다’와 ‘이해하다’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으며, 명사형인 ‘앙탕트’(entente) 역시 ‘듣기’와 ‘이해하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명사의 부정형인 메장탕트는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다른 한편 메장탕트는 ‘논쟁’이나 ‘갈등’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메장탕트는 한국말로 온전히 번역이 되기 어려운 말입니다. 한국어에서는 불화의 의미가 갈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랑시에르의 불화는 한국어의 불화란 의미에서 이해하지 못함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합니다. 이에 대해서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어 불화가 정치를 만들어 낸 것을 설명합니다.
기원전 470여년 무렵에 일어난 고대 로마 평민들의 반란 사건, 고대 전승을 통해 희미하게 전해지는 이 사건을 통해 불화의 사례로 복원합니다. 외부의 적들과 전쟁을 벌이던 로마의 평민들은 자신들의 개혁 요구를 귀족들이 거부하자, 전쟁을 중단하고 로마 바깥에 있던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는 것을 두려워한 귀족들은 협상 대표자인 메네니우스 아그리파를 파견하여 평민들과 협상을 벌입니다. 아그리파는 평민들에게 위장에 관한 유명한 우화를 들려줍니다. 자신들은 힘들게 일하는데 편하게 놀고먹는 위(胃)를 골탕 먹이기 위해 사지(四肢)가 힘을 합쳐 태업을 벌이지만, 위에 음식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신들이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사지는 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는 요지의 이 우화를 통해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 평민들은 로마로 복귀합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이 이야기를 차용할 때 발랑슈의 재구성된 이야기를 가져오는데, 여기서 가상으로 구성한 원로원들 사이의 대화에 주목합니다. 이 대화에서 원로원들은 아그리파가 우화를 통해 평민들을 설득하려 했다는 사실에 큰 노여움을 표시합니다.
“어찌 메네니우스가 “그들도 우리처럼 말을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입이 얼어붙기라도 했는가, 눈이 멀었는가, 아니면 귀가 먹었는가? 또는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 그는 어찌해서 그들에게, 그들은 덧없는 소리이고 일종의 울음소리이며 지능의 명시적 표현이 아니라 욕구의 기호에 불과한, 일시적인 말을 가졌을 뿐이라고 답변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들은 과거에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하게 될 영원한 말을 갖고 있지 못하노라고.”
원로원이 보기에 평민들은 진정한 이성을 갖추지 못했고 말할 능력도 지니고 있지 못한 존재로 이해됩니다. 그들의 말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울음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아그리파가 우화를 통해 평민들을 설득하려 했다는 것은 평민들 역시 동등하게 이성과 이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평민들은 단순히 무력 투쟁을 통해 귀족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협상 대표인 아그리파와의 대화를 통해 귀족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또 그러한 입장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자신들이 귀족들과 동등한 이해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로마라는 정치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임을 입증합니다.
“요컨대 발랑슈의 언어에 따르면, 그들은 전에는 ‘유한한 생명체’(mortels)에 불과했지만 이제 ‘인간’이 되었다. 곧 단어들을 통해 집합적인 운명에 참여하는 존재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약속을 하고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존재자들이 된 것이다.”(랑시에르, 『불화』 中)
랑시에르가 생각하기에 불화의 운동력은 서로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불화는 정치의 기초로 작동합니다. 바로 이 지점, 모두가 다르지만, 동시에 평등하다는 인정에서 랑시에르의 정치는 시작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불화의 운동성은 외부의 추동이 아닌 인식이란 힘 속에서 나타나는 자기동력적 힘으로 보입니다. 자기동력의 추동과 서로 다른 운동자들의 충돌 속에서 정치가 시작합니다.
랑시에르와 마르크스의 연결성
랑시에르로 시작한 발표문 이야기의 시작은 마르크스 이론의 접목을 통해 역동적 운동성의 확보로 끝을 맺는다. 문제는 위에서 이야기한 랑시에르의 자기 동력적 힘이 마르크스주의 내의 이론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알랭 바디우와 발리바르, 랑시에르까지 모두 포스트-알튀세르의 학자들입니다. 발리바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알튀세르의 극복을 일정하게 이야기하는 학자들로 랑시에르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일정한 단절을 선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랑시에르와 마르크스주의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논리적 연결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특히 결론에서 발표문은 테리 이글턴의 ‘뇌수술의 비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집단지성을 통해서 뇌수술과 같은 정교한 작업은 불가능합니다. 어디서나 스페셜리스트는 필요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분석해야 하는 지식인들의 역할 역시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위의 존재 자체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위의 역할을 “다양하고 이질적인 조직 중 하나로서, 또는 대중의 한 부위로서 존재”로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위의 정리가 전위의 본래적 역할인지, 또한 그 이질적 집단의 하나로 누군가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이미 ‘아르케의 정치’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일정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통일성과 보편성,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통일성을 통해서 운동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발표문이 랑시에르를 넘어서서 나오는 결론으로 이해가 됩니다. 여기서 고민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들의 연장선입니다. 랑시에르의 정치는 보편성에서 멀어져가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불화를 통해서 평등을 구성하는 정치의 힘은 보편성보다는 다양성의 인정을 중심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단성, 혹은 이데올로기의 보편적 개채를 다양성 속에서 개별적 개체로 해체하고 호명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의 재구성하여 주체화를 진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주체화에 대해서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자기(soi)가 아니라 하나의 자기와 타자 사이의 관계인 하나를 형성하는 것이다.”(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中)
랑시에르는 관계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결과적으로 정치를 형성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통일성은 랑시에르 정치철학과 일정하게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개념이고 보편성 역시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개념입니다. 통일된 지도력과 통일된 조직의 건설 어느 것이나 랑시에르의 문제의식과 일정하게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도 근대의 산물이고 근대적 보편성에 대한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본 토론문이 전반적으로 랑시에르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는 발표문이 광장의 저항을 랑시에르로 다시금 바라봐는 것이 발표문의 목적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에서 가지는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의 과학과 운동의 융합을 통해 보완하자는 것이 발표의 핵심으로 이해했고 이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부족한 토론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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