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로티의 연대
-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을 중심으로
Ⅰ.
철저한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의 분리를 통한 개인의 활동영역을 확보하는 일련의 기획 속에서 등장한 자유주의의 논의들은 결과적으로 무엇이 개인들로 하여금 왜, 그리고 어떻게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의문을 남겨두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시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을 철저한 분리를 혼합하는 방식을 취하는 일련의 방식들이 나타났지만 리처드 로티의 경우에는 이런 철저한 분리를 유지한 상태에서도 연대를 통해서 이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가능하다고 이야기 한다. 로티는 두 영역이 온전히 구분되어 있을 때 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해결적인 대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실제로 벌어지는 다양한 세계를 살펴보았을 때도 실효성을 확인할 수 있다(로티, 1996, 20).
로티는 사적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자아 완성을 추구하는 개인의 욕망과 그 욕망을 추구하는 구체적인 인물을 특징짓기 위해서 ‘아이러니스트’(로티, 1996, 22)라는 인물상을 제시한다. 아이러니스트는 사적 욕망을 챙기지만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하는 인물상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개인을 로티는 ‘자유주의자’로 명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자아추구와 사회적 책임의 상반되어 보이는 듯한 두 가치가 구체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아이러니스트에게 있어서는 공존이 가능하다고 로티는 판단한다(로티, 1996, 26).
Ⅱ.
그렇다면 공적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실천적 행동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로티는 이 것은 연대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로티가 이야기하는 연대는 무엇인가?
연대에 대한 개념을 끌어내는 방법에 있어서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한 가지는 통시대적인, 그리고 공간과 문화에 초월하여 보편적인 ‘정의’를 통해서 연대성의 개념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로티는 이런 방식으로 연대의 념을 도출하는 것이 전통적인 철학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로티는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와 은 철학적 전통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진리를 탐구의 중심 주제로 삼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초월적 신성, 자연적 본성, 인간적 이성 등의 ‘실재’를 찾는 작업을 진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재’를 찾기 위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의미론적 “실재론”의 입장에 경도되어 연대의 개념을 매우 협소하거나, 위협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들을 로티는 본질주의, 토대주의, 표상주의와 같은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자신을 반본질주의, 반토대주의, 반표상주의로 설명한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추구가 사라진 자리에는 언어의 우연성이 자리잡게 된다. 언어의 의미는 사용되는 사용맥락에 따라 결정되고 가변적이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다른 방법은 시대나 문화에서 기준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도덕, 양심, 선 등의 다양한 윤리적, 도덕적 덕목을 지향하는 의미에서 연대성의 개념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또한 로티는 부정한다. 언어의 의미는 사용되는 사용맥락에 따라 결정되고 가변적이게 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개인의 자아 역시도 확고하고, 불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아’는 자신의 믿음과 욕망들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우연적인 언어망으로 이해되고, 더욱이 그런 자아들로 구성된 공동체 또한 보편적 이성에 근거해 구축된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우연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연적 공동체가 될 뿐이라고 설명한다(로티, 1996).
결국 로티는 언어의 우연성을 인정하면서 믿음과 욕망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언어적 망으로서의 자아와 그런 자아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모두 우연적 산물로 이해하는 방식을 주장한다.
Ⅲ.
로티의 경우에는 이런 양쪽의 개념 모두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연대개념을 이끌어낸다. 로티에게 있어서 연대성은 보편적 정의를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저한 시대나 문화에 대한 산물도 아니며, 우리에게 구체적인 잔인성의 다양한 양상들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로티가 연대성을 막연한 추상적 공동체의 보편적 연대성을 이론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는 것과 연관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연대의 개념은 구체적인 사회적 산물인 자유주의 사회, 혹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현실적으로 마련가능한 구체적인 연대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티는 생각했다.
로티는 자유주의적 사회에서만이 진리라는 것도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스트들의 사회는 이런 사회이며,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자신의 자아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연대의 가능성이 없어 보일 수 있다. 결국 로티는 어떻게 하면 구성원들이 자신의 사회를 안정적이고 결속된 사회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답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연대성을 이야기한다. 로티는 연대성의 개념을 “이미 공유된 어떤 것에 대한 인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삶의 세세한 부분을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문제”(로티, 1996, 345)로 이해한다.다시 말해서, 로티에게 있어서 연대성이란 인간이 공유하는 본성에 대한 이성적 발젼을 통해서 확보된다기 보다는 서로 상이함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상상력을 통해서 서로의 유사한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느끼는 실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연대성의 느낌은 필연적으로 어떤 유사성과 비유사성이 우리에게 현저하게 느껴지느냐의 문제이고,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현저하게 느껴지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은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의 기능이라는 것이다.”(로티, 1996, 348)
로티는 연대성의 개념을 셀라스로부터 빌어 온 ‘우리 중의 하나’라는 개념과 연관시킨다. 셀라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를 우리 중의 하나로 생각함으로써 그리고 일종의 박애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중의 하나로서 혹은 도덕적 관점에서 공통의 선을 의지함으로써 공동체, 즉 우리를 구성한다.” 이것이 로티가 생각하고 있었던 연대성의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매우 좁고 구체적인 인간들 간의 관계 안에서 연대성이 나타나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 속에서 연대성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때 연대성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인종보다는 더 작고 지역적인 단위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르킨다.(로티, 1996, 345)
로티는 구성원들이 느끼는 이러한 감정들을 “우리-지향(we-intentions)”라고 설명하며 이런 방식을 통해서 연대성을 형성하고 이런 “우리-지향(we-intentions)”을 확대하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의 연대성을 확대해야 함을 주장한다. 이를 확대하는데 중요한 역항르 하는 것이 결국 구체적인 잔인성에 대한 주목이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게 함으로써 이 잔인성을 낮추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연대성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로티는 잔인성을 깎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공동체의 “우리-지향”이라는 연대성을 형성하게 되고 그 결과 자유로운 연대적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실천성은 이론적인 담론들과 구성들보다 더 유의미하고 중요한 것이란 강조도 같이 한다.
잔인성을 깎아내는 과정은 우리에게 예민한 감수성을 키우게 하고, 그 예민해진 감수성은 다시 고통받는 타인의 굴욕을 줄이는 방향으로 우리의 시선을 모으고 이 과정에서 ‘우리’라는 연대감을 형성해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우리’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외부자에 대한 무시의 감정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우리-지향”은 변화하지 못하는 것인가?
로티는 이 문제에 있어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로티는 연대성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인간성 자체’와 동일시된 것으로서의 인간 의 연대성”이 아니라 “지난 수세기 동안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고취되어 온 자기-의심으로서의 인간의 연대성”(로티, 1996, 359)임을 강조한다. 자유주의적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들은 자신의 ‘우리-지향’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의문을 던지며 우리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우리의 틀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외부의 ‘그들’을 우리의 틀에 맞추도록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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