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사상

이사야 벌린과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

※ 이글은 공부를 하기 위해 습작으로 쓴 글입니다.


이사야 벌린은 자신의 논문 Two Concepts of Liberty에서 자유를 Negative LibertyPositive Liberty로 구분한다. 이사야 벌린은 Negative Liberty를 중하게 여기고 정치적 자유는 이것에만 기초해야 한다고 믿는다. 근대 서구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개인(Individual)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근대 서구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었고 그녀는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Negative Liberty라고 생각했다.

LibertarianHospers는 세상에 세 종류의 법이 있음을 언급하며 무엇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다. 둘째, 개인 각각으로부터의 자유다. 셋째, 필요로부터의 자유이다. 여기서 자유지상주의자인 Hospers는 여기서 오직 두 번째만이 자유의 유일한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만이 오직 Negative Liberty와 연결되어 개인의 독립된 자유를 보장한다. 반면 나머지 둘은 Positive Liberty와 연결되기 때문에 부정적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와 같은 보호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Positive Liberty에 내포된 두 가지의 의미에서 시작된다. 첫째는 “Freedom to”의 의미이다. 두 번째는 “Autonomy”의 의미이다. 이 두 의미들이 우리의 삶에 연결되면서 바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Freedom to”의 의미는 능력과 연결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형식적으로 모든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서 주어진 삶을 실질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이런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Positive Liberty를 옹호하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복지법과 같은 법률이 바로 Positive Liberty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결과적으로 자유를 줄여서 자유를 증진한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이것을 보고 부도덕하며 부정의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런 설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일정부분의 자유가 훼손되었는데 자유를 증진시켰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된다. 모순이 되지 않으려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는 줄어들었지만 전체적인 자유를 증진시켰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개인의 자유는 여전히 전반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말한다. 바로 이 지점, Positive Liberty가 추구될수록 개인의 자유가 축소되는 문제로 인해서 이사야 벌린은 Positive Liberty를 거부한다.

한편, “Autonomy”의 의미와 삶이 연결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연결된다. 나의 모든 결정은 모두 나에게 달려있다는 선언을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신을 지배하는 나는 누구이고 자신에게 지배당하는 나는 무엇인가? 자신을 나눌 때 지배자는 이성적이고 본체적 성격의 고차원적인 나이고, 피지배자는 감정적이고 현상적인 저차원적인 나. 고차원적인 나는 저차원적인 나를 지배함으로써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하등한 자아에 따른 행동은 실제로 타율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실제로 당신의 진정한 자아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만들어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있어.”라는 루소의 말은 이런 아이러니를 잘 설명해준다.

벌린이 걱정하는 문제는 이 설명 자체에 있지 않다. 루소에서 시작된 이 흐름이 흘러가는 특별한 한 방향이 문제다 루소의 일반의지에서 시작된 이 구별된 자아의 개념은 헤겔과 피히테, 그리고 맋스로 이어지면서 개인적 차원의 자아에서 집단적 차원의 자아의 성격을 가지게 되고 명확해진다. 사회의 진정한 목적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기 쉬워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높은 이성을 가진 집단이 행하는 감정적 행동을 하는 집단에 대한 지배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지배는 근대 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한 당시 전체주의와 대결하던 시대적 맥락에서 이사야 벌린이 전제주의와 연결성이 높은 Positive Liberty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기 어려웠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강제는 전제주의의 설명과 친화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었다. 이사야 벌린은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며 Positive Liberty를 거부한다.

이사야 벌린이 하는 걱정의 지점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Positive Liberty는 적극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서 다가오는 위협에 대해서 안전함을 느끼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 살아갈 때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결국 “~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할 자유를 행사해야 온전한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속한 공동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우리는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행사해야 할 필요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사야 벌린이 Negative Liberty만을 옹호하는 것은 반쪽짜리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많은 부분에서 반박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첫 번째는 정부가 최소한의 행동을 하는 것만이 자유를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과적 모순을 낳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된다면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국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국가가 된다. 국가가 자신의 기능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홉스가 이야기한 자연상태의 모습과 어느 지점에서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남는다. 두 번째는 첫째 반박과 맞물려 나타난다. 그들이 상상하는 국가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모든 결정을 사적 영역에 놓아두고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에 어떤 일이 있어도 개입하지 않는 국가의 모습이다. 국가가 사적 영역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국가의 어떤 행위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국가는 언제나 문제가 발생한 이후에 뒤처리를 하게 된다. 매번 문제를 뒤에서 처리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셋째, 다수에게 실질적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과연 소극적 자유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은 갖춰져 있지만 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면 다수는 사실상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과 같다. 돈과 관련된 사적 소유에 대한 문제는 긍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건강이나 생명의 문제와 연결된다면 Negative Liberty만을 옹호하는 것이 올바른지 판단하기 어렵게 된다. 넷째, 국가를 유지하고 Negative Liberty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신이 적극적으로 국가의 정치적 활동에 나서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Negative Liberty 옹호자는 국가가 최소한으로 운영되기를 원한다. 최소한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온화한 독재자(혹은 국왕)이 존재한다면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런 형태의 정치운영은 안정성을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에 Negative Liberty를 원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어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민주정체가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 민주정체가 Negative Liberty를 추구하겨면 결과적으로 Negative Liberty를 옹호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국가의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Negative Liberty를 위해서 Positive Liberty를 행사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문제로 인해서 Negative Liberty만을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특히나 마지막으로 지적한 문제로 인해서 Positive Liberty를 추구함으로써 Negative Liberty가 가능해진다는 점은 Positive Liberty를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