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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

도덕적 공리주의, 덕윤리, 의무론적 윤리

우선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도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각각의 도덕률은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 기준을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들이다. 또한 행동을 어느 지점에서 판단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결과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고찰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역시 도덕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에 포함될 것이다. 또한 도덕적 행위를 함으로써 얻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 도덕론의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에 맞춰서 각각의 도덕론을 비교하고자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옳고 그름의 판단 방식이다. 두 번째 조건은 인간 존재에 대한 판단이다. 각각의 마지막 조건은 도덕 행위가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다.

우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방식은 각각의 도덕률을 어떤 방식으로 상이함을 보여주는가? Consequentialism을 대표하는 도덕이론은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오직 행위를 결과만을 통해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를 측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리주의 안에서 상이한 차이를 보인다.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행위 공리주의라 할 수 있는 고전적 공리주의와 새롭게 등장한 규칙 공리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둘은 도덕적 판단 대상조차 상이하게 생각한다. 또한 고전적 공리주의 안에서도 판단 시점과 판단 방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확실한 공통점은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서 계산을 통한 결과의 측정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고전적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것은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다. 둘은 모두 행위를 직접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판단을 내리는 시점과 계산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벤담에게 있어서 결과의 측정은 매우 명확하다. 벤담은 모든 행위를 쾌락과 고통의 양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고통과 쾌락의 값을 정해서 각각의 행위를 이 값에 맞춰 환산한다면 어떤 행위가 좋은 행위이고 어떤 행위가 안 좋은 행위인지 구분한 수 있다고 믿었다. 벤담의 판단은 즉각적으로 행위를 양적으로 전환시켰다. 반면 밀에게 있어서는 판단 시점이 꼭 지금 시점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고귀한 쾌락과 저급한 쾌락이 구분 되서 존재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고귀한 쾌락은 즉각적으로 좋음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점을 뒤로 딜레이 시켜 행위를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양적으로 전환해서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양만으로 살필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은 양의 쾌락을 위해 다수의 고통을 감내할 때 이것을 단순히 동질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따라서 밀은 고귀한 쾌락과 저급한 쾌락을 차등지어 계산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규칙 공리주의는 행동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결과로써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각각의 규범들이 공리주의의 원칙으로 계산했을 때 최고로 적합한지를 판단한다. 이것은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행위라도 결과만 좋으면 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행위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규범을 평가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계산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계산된 규범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들은 도덕적 판단의 시점을 규범이 선정되는 시점까지 끌어 내린다. 공리준의는 각기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하게 판단의 기준점을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행위가 끝난 이후의 결과를 기준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들을 결과주의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그들의 명확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결과가 아닌 동기가 생기는 지점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믿는 도덕론이 존재한다. 의무론을 이런 입장에서 대표적이다. 의무론의 대표는 칸트다. 칸트는 옳음의 기준을 의무라는 기준을 통해서 의무를 행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여부에 기댄다. 의무가 없는 곳에서는 도덕적 옳고 그름의 판단도 무의미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이 의무를 정언명령이란 이름으로 말한다. 그렇다고 그의 의무론이 중세에서 말하는 신이 부여한, 즉 외부에서 부여한 의무라고 생각해서 안 된다. 그는 의무가 보편적 법칙으로 작용할 수 있는 근거를 인간 내부에 위치시킨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오성 형식과 감성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보편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외부성은 우리의 판단 영역에 위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과론이 가지고 있는 결과에 대한 믿음을 부정해 버린다. 칸트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이성을 가지고 있음을 통해 우리의 행동 준칙이 언제나 보편화 가능성을 가지고 있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우리는 이 모든 이성적 존재가 그 평등성으로 인하여 존중의 대상이고 목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이 목적으로 대우되는 것이 언제나 합당했다. 그들은 우리의 동기가 보편적 준칙으로 인도하는 존재들이었다. 우리는 목적의 합목적성을 지닌 세계에 살아갈 때 도덕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따라 칸트는 도덕적 원칙의 세 법칙을 제기한다. 하나는 그 준칙을 통해서 네가 그것을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 삼으려고 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명령이다. 두 번째는 네가 네 인격 안의 인간성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 안의 인간성까지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동하라는 것이 다른 하나의 명령이다. 마지막은 의지가 자기의 준칙에 의해 스스로를 동시에 보편적으로 법칙을 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현대의 목적론의 대표격인 Ross 역시도 칸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칸트가 가지고 있는 행위 동기의 중요성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는 충돌하는 도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견 도덕적인 것으로 보이는 의무를 목록화 하고 이 중에서 가까운 도덕과 먼 도덕을 구분하여 가까운 도덕을 우선시하는 결과론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도덕에 있어서 동기의 중요성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한편 동기나 결과를 중시하는 것과 다르게 시민의 탁월성(Virtue), 혹은 품성을 중요시하는 입장이 있다. 그들은 탁월성(Virtue)을 증진 시키는 행위야말로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사람들이다. Virtue Ethics을 주장하는 대표격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의 최종적 목적을 Eudaimonia라 생각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탁월성(Virtue)을 키우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탁월성은 이성을 활용하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고 이성을 갖추자마자 탁월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가장 중요한 윤리적 행동은 중용이다. 과함과 모자람 사이를 번갈아가며 실행함으로써 적정한 순간에 필요한 행동을 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으로써 품성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습관화하여 어느 행동에서든 거슬림이 없이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덕 윤리를 말하는 멕킨타이어에게도 품성을 키우는 실천은 도덕적으로 중요하고 실천을 통해서만 우리는 도덕적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확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는 도덕적인 품성을 만들고자 실천을 모두 포함한다.

그렇다면 이 각각의 도덕이론은 인간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을 하고 있을까? 인간 존재가 모두 평등하는 생각에 대해서는 의무론과 결과주의 모두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의무론의 입장에서 인간의 평등성은 그들이 가진 오성형식과 감성형식이 공평하게 주어진 존재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모두 목적으로 대해져야 하는 타자가 되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공리주의는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지점에서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대체로 비슷하게 고통과 쾌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담은 직접적으로 인간은 쾌락과 고통이라는 독재적인 지배자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언급했다. 인간은 모두 동일한 영향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반면 덕 윤리학자들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모든 사람은 도덕적으로 좋은 품성을 가질 씨앗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그러나 그 품성을 키워서 가지게 되는 품성에는 상이한 차이가 발생할 것이다. 좋은 습관을 들인 사람이 있고 나쁜 습관을 들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를 평등하다고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의무론에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 이성이 인간을 다른 사물과 다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고 우리가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를 제공한다. 도덕적 행위의 동기를 중요시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그 동기로 인하여 다른 사물과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책임이다. 반면 결과론은 이런 생각과는 상당히 반대 위치에 서 있다. 결과론의 대표격인 공리주의는 고통과 쾌락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행동의 원칙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성 역시 쾌락과 고통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인간은 고통과 쾌락의 지배를 받는다면 우리가 느끼는 감성을 잘 구분한다면 우리의 행동 원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칸트의 생각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칸트는 이성의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고, 결과론은 감각의 지배를 받는 인간을 상상한다. 한편 덕 윤리론자들은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바라본다. 덕 윤리론자들은 대부분 공동체주의자들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이 사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덕이 기본적으로 실천의 배경을 가지고 있고 개인 삶의 설화적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특히나 개인의 삶은 공동체의 전통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개인의 삶은 공동체와 구분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심지어 인간은 사회를 벗어나는 순간 인간이 아니게 됨을 자신의 저서 정치학에서 언급하고 있다. 동시에 인간은 텔로스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사물은 텔로스를 향해 가는데, 인간은 자신의 탁월성, 특히나 이성을 잘 활용함으로써 가장 완벽한 형태의 인간이 되려는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들은 도덕적 행동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그냥 자유롭게 살아가면 안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결과론자들은, 특히나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자신들의 구호를 통해서 이것을 명확히 드러낸다. 인간 존재가 평등하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좋은 삶이고 올바른 삶이란 생각이 그들에게 담겨져 있다. 행복이란 말이 싫다면 이것을 Welfare라고 생각해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한편 의무론자들은, 특히나 칸트의 경우에는 행복이나 Welfare와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칸트의 최종적 목표는 목적의 나라를 구성하는 것이다. 도덕적 주체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로우며 그들이 자유로운 공동체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나라는 바로 공화국의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칸트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유를 구가하며 살아가는 것을 꿈꿨다. 마지막으로 덕 윤리론자들은 인간이 훌륭한 품성을 가지고 훌륭함을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그것이 인간 존재의 텔로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