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1 -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체로 추구하는 것이면서, 다른 것이 이것을 추구해야 하고, 모든 것의 목적이 다른 것이 아닌 것을 최상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의 최종 목적은 무엇일까? 그는 “인간적인 좋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너무 많은 목적들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들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하나만 완벽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런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되는 것이면서,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행복(eudaimonia)’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을 위해서 선택하지도 않고 동시에 다른 것들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완전한 좋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족적인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자족성은 혼자만의 자족성은 아니다. 인간은 폴리스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한계를 부여해야만 한다.
정말로 행복이 우리의 최선의 목적인지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를 살펴본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과 관계를 가지기 전부터 있는 것이지 않은가. 실체는 언제나 관계보다 앞서는 법이다. 플라톤의 좋음이란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성취 가능한 것이 아니게 된다. 심지어 좋음은 너무나 다양하게 이야기 되는데 범주가 많아서 단일화되지도 않는다. ‘좋음의 이데아’를 인정하긴 난감해진다. 거기다가 ‘좋음의 이데아’를 제외하고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행위들이 공허해 질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추구할수록 좋음은 인간이 소유하거나 성취 가능한 대상이 아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성취 가능한 것을 찾길 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토대를 인간의 고유한 기능에 놓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행복이 우리를 통해서 성취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행복(eudaimonia)’을 살펴보려면 인간의 기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행복이 폴리스적 동물인 인간만이 ‘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만의 기능을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펴보면 다른 생물체와 다르게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이성을 가지고 실천하는 삶이다. 여기서 ‘이성을 가진 것’이란 의미는 이성에 복종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이성을 가지고 사유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을 살펴보면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라서 인간만의 활동이 우월적으로 들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 ‘인간적인 좋음’이다. 여기서 탁월함이 중요한 이유는 탁월성은 인간 종에 속하는 나의 좋음을 구성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탁월성과 탁월성의 발휘가 행복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탁월성을 잘 발휘해서 고유의 좋음에 이르면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하나의 상태일까 아니면 활동일까? 그것은 탁월성의 소유인가 아니면 사용인가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을 이야기할 때 이 모든 것을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태인가 아니면 행동인가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탁월성을 소유만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좋음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용감하거나 비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용감함을 발휘하는 것, 그리고 탐욕스러울 수 있는 상황에서 탐욕을 억제하는 행동을 발휘하는 것이 인간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결국 주어진 기능을 발휘할 기회가 오면 최대한 잘 발휘하는 영혼의 품성상태가 탁월성이므로 행복은 행동과 관련이 있다. 탁월성은 자신 속에서 뛰어난 발휘의 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잘 발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회만 주어지만 언제든 잘 발휘되는 품성상태를 가지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탁월성은 결국 활동인 것이다.
행복을 탐구할 때 우리는 두 통념과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행복은 즐거운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후반부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또 하나의 통념은 결국 외적인 것들이 행복에 관여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사실 탁월함을 발휘하기 위해서 외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가령 돈이 없다거나 신체의 건강이 없다면 탁월함을 발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행복을 외적인 행운들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탁월함은 결국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고 불행 속에서 고귀함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행운이 행복과 동일한 것이란 생각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또 다른 의문점에 다가가 보자. 행복(eudaimonia)가 활동이라고 한다면 그 활동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본성에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말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좋음이라면 우연에 의해서 주어진 다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라고 언급한다. 행복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고 영혼의 활동은 일종의 학습들에 따라서 성취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육과 정치의 목적은 실현 가능한 것이 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이고 실천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어 질 것이란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있는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는 행복의 이야기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행복을 이야기하면서 활동을 이야기할 때 목적이 완전히 배제 될 수 없다. 사실 목적이 행동의 근원이 된다. 이렇게 행복을 규정해야만 우리는 단순히 행동을 하는 사람의 외부적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설명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지못해서 하거나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 외면적으로 훌륭함의 모습으로 들어난다고 해서 그를 훌륭한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행복한 사람은 목적을 추구하는 그의 품성상태를 보면서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인간의 성격, 혹은 품성에 관계되는 학문이다.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그가 바라보는 자유의 문제이다. 행복을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동물적인 본성을 거슬러 올라가서 인간만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일이 그에게 있어서 자유로 보인다. 이런 생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이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자유를 이렇게 바라본다면 정치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어쩔 수 없이 조정해야할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기보다 모든 인간이 온전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인간을 완성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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