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2 - 탁월성
탁월성은 그의 윤리학에 있어서 행복 구현의 핵심이 된다. 행복(eudaimonia)은 그의 윤리학의 시작점이자 귀결점이라고 한다면 탁월성은 행복을 이해하는 큰 축이다. 탁월성은 무엇이든 좋은 상태에 있게 만들고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성격적 탁월성
탁월성은 영혼의 탁월성이다. 그것의 한 부분은 성격적 탁월성이다. 습관의 결과로 나타나는 부분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서 발생되는 것은 세 가지로 생각했다. 하나는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 다른 하나는 품성상태이다. 그러나 감정이 탁월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능력은 우리가 감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나 느끼는 능력만으로는 탁월성을 찾을 수 없다. 결국 남는 것은 품성상태만이 남는다. 탁월성은 품성상태와 관계하는 것이다. 결국 품성상태(hexis)는 유사한 활동들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활동의 차이가 품성상태의 차이를 유발한다. 지나치고 모자람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탁월성을 파괴한다. 탁월성을 올바른 이성에 따라 행위되는 것으로 결국은 중용을 따라 행도하게 되었을 때 보존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언제나 정의롭게 될 수도 있고 부정의하게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능성은 사람이 활동의 폭을 스스로 결정함에 따라서 성격을 구성하게 되면서 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점차 한 쪽으로 완성적 형태를 가지게 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는 것 같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죽 이렇게 습관을 들엿는지, 혹은 저렇게 습관을 들였는지는 결코 사소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큰 차이, 아니 모든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 행동을 통해서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정의로운 행동을 하면 우리는 이미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피아노를 치면 이미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인 것과 같이 용기 있는 행동을 하면 용기 있는 사람인 것으로 판단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예와 탁월성은 몇 가지 부분에서 다른 것 같다. 기예는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해서 실행을 하거나,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탁월성은 이것들을 끊임없이 고려하면서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하는 것만이 이것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도록 해준다. 즉 정의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그냥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렇게 이루어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해져야 한다. 그럴 때만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행동을 한 것이다. 결국 정의로운 행동으로부터 정의로운 사람이 나온다. 말로만 해서는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데 탁월성은 모든 품성상태에 관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품성상태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기 때문이다. 탁월성은 인간을 그것으로 좋은 인간을 만들고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품성상태에서도 이것을 잘 이룰 수 있는 품성상태랑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분할할 수 있는 것들을 3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많은 것이 있고 더 적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한 중간도 있다. 여기서 중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선 대상에서의 중간은 양 극단의 한 가운데를 의미한다. 우리와의 관계에서 중간은 넘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와의 관계에서 중간은 모든 사람에게 같지도 않고 하나도 아니다. 여기서는 대상에서의 중간과 같은 방식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모든 전문적인 앎은 이 중간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탁월함도 이 중간을 찾아가는 작업이 된다. 감정들과 행위에 관계 될 때도 중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탁월함은 결국 시간적으로, 당위적으로, 대상에 대해서도, 목적에 있어서도, 방식에 있어서도 마땅히 갖춰서 감정을 가지고 행위를 하는 일을 말한다. 이렇게 될 때에만 우리는 누군가를 칭찬하기 때문이다. 잘못은 수업이 많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좋은 것은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을 마땅히 갖추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나타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탁월성은 합리적인 선택과 결부된 품성상태로 중용에 의존한다. 그러나 모든 행위와 감정이 중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나쁨과 묶여있어서 그 자체로 나쁜 것들이 존재한다. 나쁨의 중용이란 것은 없다.
성격적 탁월함을 개별적인 것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은 표가 나온다.
모자람 | 중용 | 지나침 |
두려움 | 용기 | 대담함 |
고통 | 절제 | 즐거움 |
인색 | ‘자유인다움’ | 낭비 |
속물경향 | 통이 큼 | 품위없음 |
소심 | 포부가 큼 | 허영 |
화낼 줄 모름 | 온화 | 성마름 |
자기비하 | 진실성 | 허풍성 |
촌스러움 | 재치 | 익살 |
뿌루퉁함 | 친애 | 아첨 |
중용을 찾아가는 실천적인 방법은 더 대립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중용에 이를 수 있는데 이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즐거운 것들과 즐거움을 경계하는 일이다.
2017/03/06 - [정치사상] -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1 -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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