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청년실업과 함께 이주노동자문제를 다루는 <방가?방가!>라는 영화가 개봉한다. 뮤지컬 <러브 인 아시아>는 직접적으로 다문화 가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임을 생각 할 때, 우리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은 사회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해야한다. 2009년 통계청의 통계에 따르면 대전·충남지방에서는 주민 100명당 1.8명이 외국인인 것으로 집계되었고 한국인이 싫어하는 3D업종의 주요 노동력이 대부분 이주노동자로 교체되었다. 한국은 이미 5000만의 인구 중 10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이 거주하는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세계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노동력과 인구가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해외에서 우리나라로 많은 노동력과 인구를 유입시켰다. 다문화 사회로의 변화는 우리나라가 이제 프랑스와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문화 사회가 되기에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우리의 태도는 후진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문화 현상을 해결하고 우리나라를 진정한 다문화 사회로 인도할 것인가?
우리나라는 외국인에 대한 제도적, 법적 장치가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제도와 법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산업연수제도가 결과적으로 불법이민자를 양산하는 정책이었으며, 이런 문제를 인식했던 정부가 발표한 고용허가제의 실패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2004년부터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산업연수제도를 통해 발생했던 불합리한 상황을 법적, 제도적 장치들로 바로 잡겠다는 표현이었다. 2010년, 고용허가제가 시행된지 이제 6년째로 접어들었으나 처우와 지위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불만과 처우개선을 요구할 경우 고용을 취소하겠다고 협박하고 사라진 강제적립금 제도를 이용하며, 임금체불이나 퇴직금 미지급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 또한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제도와 법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구이다. 그러나 도구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서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 되기도 하고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도구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영향도 기능도 없고 오직 인간이 사용을 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결국 제도와 법도 사용하는 사람의 심성과 상황에 많은 부분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생각해서 법과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결국 어느 부분에서는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사각지에 속한 이들은 결국 법과 제도의 안전망을 벗어난다. 그렇다고 법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세부사항을 넣어 조항을 추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제도와 법으로는 결코 다문화 현상들을 해결할 수 없다.
박범신은 <나마스테>에서 이주노동자의 문제와 그 문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한국인의 의식상태를 비판한다. ‘나마스테’라는 말이 가진 의미처럼 카밀과 신우를 통해 박범신은 우리가 이주노동자들과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만남을 시작하고 아름다운 소통을 시작해야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책속의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을 피부색이나 각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 그리고 모국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그들을 무시한다. 그들을 한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업장에서는 값싸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동력으로써 바라본다. 우리는 그들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오직 ‘다르다는 것’ 자체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해 버린다.
결국 다문화 문제의 근간에는 편협한 ‘우리’로 꽁꽁 묶여있는 타인에 대한 배타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반대항으로 이주민을 바라보며 그들이 본질을 알려하지 않고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를 통해 분리하려고만 노력을 한다. 그리고 절대 ‘우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다문화 현상의 근본적인 해결에는 의식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의식의변화는 타자에 대한 ‘관용’이나 ‘환대’와 같은 변화여서는 안 된다. 관용과 환대는 기본적으로 타자를 허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타자를 허용할 것에 대한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약자의 입장에서는 가능하지 않고 오직 타자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생겨날 수 있다. 이는 타자를 ‘우리’와 완벽하게 분리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우리가 관용이나 환대를 하는 타자는 있는 그 자체로 본 타자가 아닌 ‘우리’와 다른 존재로 인식한, 편견에 바탕을 둔 타자여도 상관이 없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의 변화는 외국인도 한민족도 같다는, 좁은 혈연주의와 신화에 불과한 단일민족의 미몽에서 벗어난 ‘넓은 우리’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넓은 우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우리의 ‘정’이다. 타인을 자신의 가족과 같이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의 발현이 바로 우리가 자랑하는 바로 ‘정’의 정서이다. ‘정’은 순수한 마음의 우러나옴이다. 이러한 마음은 ‘넓은 우리’를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다. ‘우리’라는 생각은 그 속에 구성원이 상호간에 심정적으로 밀접함을 생각하는 것이며 상호간에 심정적 밀접함의 근본은 가족이다. ‘정’은 바로 우리 주변을 모두 가족과 같이 생각하는 마음에서 발현되는 것이고 따라서 ‘넓은 우리’를 만드는 중요한 정서가 된다. 그 ‘정’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이주민을 우리 밖의 타자로 보지 않고 우리의 일부로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신우와 카밀이 가정을 꾸리는 <나마스테>의 장면은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임을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가 이주노동자를 우리의 외부의 존재가 아닌 우리 내부의 존재로 인식해야 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그들이 스스로 찾아낸 다문화 현상에 대한 대처였다. 프랑스는 똘레랑스를 통해 타자를 존중함으로써 자신도 존중받는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존중받기위해 타자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사회의 형성이었다. 그러나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들의 똘레랑스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집시들에 대한 강제출국 명령 등 지금 프랑스 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보수적이고 극우적 움직임은 프랑스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다. 타자와 자신을 나누는 이러한 구분은 상대적 강자가 약자를 환대하고 관용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다시금 다문화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가 벌어질 가능성의 내포는 결국 이런 방식이 미봉책에 불과함을 일깨워준다.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우리가 따라해야할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방식으로 다문화 현상을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주자들을 우리 밖의 타자로 내버려두는 방식이 아닌 적극적으로 우리로 받아들이는 노력을 진행해야한다. ‘넓은 우리’의 탄생이 필요하다. 일부에서 이주민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문화의 말살이 이루어질 것이란 우려를 표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문화 또한 변화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전통이라 부는 문화들은 중국과 몽골 그리고 서역의 문화가 융합되어 이룩된 문화이다. 이주민들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말살이 아닌 이주민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나가는 일이다. 우리의 수많은 풍습들이 몽골의 간섭기에 새롭게 생겨났던 것처럼 이제 이주민의 문화, 우리의 문화란 구분이 없어지고 대한민국의 문화가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다문화 현상을 성찰하고 그럼으로써 한국인은 바로 이 땅에서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땅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 낼 것을 요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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