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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고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최초의 단위는 가족이고 확장된 단위는 최종적으로 polis라고 그는 생각했다. polis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는 좋은 삶이라는 인간의 목적을 실현하는 공간이 되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공동체에서 벗어나 살아가면 신이거나 동물일 것이라고 지칭한다. 홀로 자급자족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벗어난 상태일 것이니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동물일까? 그는 정치적 훈련을 받지 않은 인간은 사악하고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본성을 벗어난 경우 우리는 절제와 정의를 모르고 되는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과 같으면서 우리가 인간이게끔 하는데 정의와 절제를 훈련할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인간의 극단은 신이 되거나 동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 인간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 적절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신과 동물의 본성을 함께 품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이 신도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신은 언제나 긍정적이기 때문에 신이 되는 것은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개인적인 의문점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국가공동체를 위협한다는 점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미묘한 갈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여하간 국가 공동체의 존속은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초다. 그 안에서 훌륭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telos. 문제는 훌륭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농부가 생업을 포기하면서 공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가의 필요성. 시민의 활동을 위해서 여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먹고사는 인간의 환경을 완전히 경시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의미에서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언뜻 보면 시대의 한계 속에서 시대가 그러하니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긍정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예제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플라톤은 노예제를 긍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이전의 사람이다. 노예제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상 근대적으로 말하자면 생활 물자를 생산할 다수의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단지 근대적인 생각과의 차이점은 그 구분을 타고난 품성의 차이에 따라서 구분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시대적 한계라기보다는 상황적 필요에 따른 요청으로 보인다.

타고난 품성의 차이가 역할을 가른다는 점을 보면 그는 여전히 플라톤의 기능적 국가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아 보인다. 국가가 기능적으로 역할이 완전히 분배되어 있지 않다면 시민들의 공직 참여를 설명하기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민의 덕성을 구현하려면 오랜 훈련과 그 훈련을 할 수 있는 여가가 분명히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다양성도 구현할 수 없다. 그러나 노예의 노동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활동이라기보다는 본성을 보조하는 역할에 멈춰져 있단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노동은 국가라는 정체를 구현하는 보조적 수단이지 그 자체가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국가의 본질이 기능적으로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공직에 참여하는 것으로, 또 그를 통해서 행복을 실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자유인다움이 바로 정치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 동물과 구분되는 신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플라톤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 시작한다. 본성을 드러내는 일보다 기능적으로 잘 돌아가는 것이 과연 국가의 일인가 하는 점이다.

완전히 기능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국가는 결국 국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인으로 국가를 전환시키는 일이 되어 버린다. 이런 국가 안에서 과연 자유인다움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공간에서는 자유인은 오직 수호자들밖에 없다. 아니 자유인조차 절대적인 진리에 따르는 하수인이다. 아무도 자유롭지도 않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절제를 통해서 우리가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공간에서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다. 플라톤은 굉장히 극단적이고 일상적인 사람들은 살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국가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무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국가는 현실에도 있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죽어서도 영예로운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죽은 다음에 영예롭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는 동안 우리는 행복해야 우리가 잘 살다 가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은 문제없이 산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자 공유는 다양한 시민들이 구성하는 국가에 친애를 없애버림으로써 국가의 단결성을 없애버린다. 사적인 소유의 철폐는 행복을 구현하는데 핵심인 탁월성을 모두 소거해버릴 위험도 있다. 사람이 절제를 모르는 것은 그의 본성이 약해서이지 사유재산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극단적으로 모든 것이 통일된 국가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일을 방해하고 그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국가라 불려도 국가가 아니다.

플라톤은 모든 행위의 중심에 진리를 놓았다. 그것이 무슨 진리인지는 오직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관조를 통해서 알아낸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으로 보기에 그것은 인간적이지 않다. 진리가 환경과 욕망을 모두 통제하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그리괴 그것이 지극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 같지도 않아 보였던 듯 싶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행위의 중심에 다시금 인간을 놓는다. 소피스트를 부정하고자 했던 플라톤이 보기에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의미는 오직 인간만이 부여하고자 하는 세계로, 그래서 혼란스러운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점을 인식했던 것인지 본성을 구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임을 명확히 하며 이런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은 영혼 혼자 따로 있고 육체의 욕망이 따로 있어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욕망도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고 영혼도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다. 단지 영혼의 활동은 일종의 운동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면 욕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초 같은 것이다. 그리고 환경도 우리에게 우연적으로 주어진 기초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초인 상태에 머물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우리의 기초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능력이 실천에 있어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기초를 잘 사용하지 못하면 동물과 다를 것이 없어질 뿐이고 우리가 잘 활용하면 동물과도 다르며 신과도 다른 인간만의 인간다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학문 중에서, 특히나 실천적인 학문 중에서 으뜸을 정치로 놓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정치는 우리를 인간답게 훈련시키는 것이고 정체는 그 훈련의 방향성과 가능성을 지침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